<삼국사기>는 부정, 중국 동북공정의 <삼국지>를 더 신뢰하는 김태식 교수...

 

 

국사교과서, 조선총독부 '쓰다소우키치'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 편찬되다...

 

김태식교수, 서기4세기에도 백제, 신라가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 모본태왕2년 서기49년 태왕은 군대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였다. 고구려 태조태왕3년 서기55년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구려 신태왕8년 서기172년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좌원에서 한나라 군대를 대파시켰다. 말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

서기49년에 고구려는 지금의 북경을 넘어 서쪽으로 산서성의 중심부 태원까지 한나라를 정벌하였다. 그리고 서기55년에 지금의 하북성 지역에 10개의 성까지 쌓았다. 또한 서기172년에는 한나라의 대군을 전멸시켰고 말 한 마리까지도 돌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개국 초기의 역동적인 역사를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아마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행 국사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우리 국사책이 철저하게 일제식민주의 사관에 따라 쓰여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일제식민사학자 쓰다소우키치가 날조해 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 써졌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위와 같은 기록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기1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강력한 국가라고 하면 서기4세기에 야마토왜가 우리나라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 홍익대학교, 역사학과 김태식 교수는 한국고대사민강좌 8회에서, 3세기까지 우리나라는 백제와 신라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일제식민주의사관의 하나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는 모두 서기전에 이미 개국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일제식민주의 사관을 해방 된지 71년이 지난 현재도 버젓이 퍼뜨리는 단체가 있다. 한국고대사학회다. 한국고대사학회는 서울대학교 등 국립대학교는 물론 사립대학교 등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진 단체다. 이 단체는 지난 3월부터 고대사시민강좌를 한성백제박물관장, 이인숙씨의 협조 하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진행하고 있다. 서기2016.11.2.에는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가 하반기 고대사 시민강좌 8강을 맡았다. 김교수는 가야를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우리나라 삼국이 5세기가 되어서야 제대로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었다고 했다. 신라는 더 늦추어서 6세기가 넘어서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주된 근거는 중국의 <삼국지>다.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가 아니라 중국의 사서 <삼국지>를 더 신뢰한다는 얘기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쓰다소우키치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교수가 쓰다소우키치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주장은 또 있다. 고구려의 천도와 관련하여 유리태왕 대의 천도는 ‘전설적인 측면도 있어서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리태왕이 서기 3년에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을 믿을 수 없는 전설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고구려가 유리태왕대에 아직 고대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천도할 정도의 국가규모를 갖추지 못한 상태인데 어떻게 천도라는 대규모 사업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 김태식 교수는 경남지방이 임나일본부가 설치된 곳으로 보았다. 조선총독부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여 식민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임나일본부설은 임나위치를 경상남도로 본다. 이것을 김태식 교수가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위 지도에 나오는 지명들은 임나일본부설이 나온 <일본서기>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김교수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가야제국을 설명하면서는 임나일본부설의 근원인 <일본서기>를 끌어왔다. 가야제국의 후반기 지명을 <일본서기>의 지명으로 대체했다. 안라, 다라, 탁순 등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신공‘황후’조에 나오는 지명을 경상남도 지역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일본서기>의 주석에만 나오는 신분이 불확실한 ‘목라근자’가 낙동강 유역을 장악한 것으로 주장했다. 이어 김 교수는 가야를 소국연맹체라고 하였다. 이 소국에서는 소국수장회가 있었는데 제한기회의를 사례로 들었다. 여기에는 임나일본부 길비신 등의 10인이 참석했는데 이들이 회의 결과를 임나일본부대신에게도 보고해서 최종 결정한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외무관서라고 규정했다. 이 외무관서는 가야연맹이 다른 나라와 대외관계를 수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김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은 일본이 고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식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임나의 위치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임나를 우리나라 남부지방이라고 한다. 김 교수도 이 일제식민사학자들의 견해를 추종하여 임나를 경상남도 일대로 보고 이번 강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김석형 교수에 의해서 임나는 결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없었고, 일본 열도내에 있었음이 증명된 바 있다. 심지어 <일본서기>에도 임나는 열도내에 있을 수밖에 없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서기>를 꿰뚫고 있고 가야와 왜와의 역사를 연구한 김교수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를 우리나라 남부로 전제하는 것은 일제식민주의 사학에 고의로 동조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한편 이날 강좌에서도 지난주 강의 비평문을 나누어 주었다. 이번에도 많은 방청객들이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어떤 방청객은 몇 주 전의 비평문도 있으면 달라고 했다. 결석을 해서 그때 것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방청객은 그동안 나누어 준 비평문을 모아서 가지런하게 강좌책자에 끼워 다니고 있었다. 마치 소책자처럼 보였다. 비평문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는 방청객도 있었다. 비평은 좋은데 왜 욕을 섞어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욕을 한 적이 없었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한국고대사학회의 행태가 국익에 정면으로 반하고 일제식민주의 사학과 같다고 비판하면서 친일사학, 매국사학 정도의 말을 쓴 정도였다. 그래서 ‘동북공정지도를 그대로 베끼고,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고 하는 집단에게 그 정도의 비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냐? 혹시 친일파 후손이 아니냐고 되물으니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날 강좌에는 지난번 보다 현저하게 참석인원이 줄어 있었다. 가져간 비평문 수십 장을 되 가져와야 했다. 다음 강좌는 중국동북공정지도를 그대로 베꼈다고 비판받는 동북아역사지도집제작에 참여한 경북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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