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식민사관을 걷어내면 실사가 보인다...

 

조선의 서쪽 국경선은 어디까지 뻗어 갔는가,

대륙의 갈석산의 위치를 찾을 때 가늠이 된다...

고구려양식의 무덤이 하북성 남단, 산동성 북단의 양평에 있다.

고구려의 국시는 '다물'이다... 조선의 옛 땅을 되찾겠다고 일어난 고구려다...

고구려 강역이 대륙 깊숙히 뻗어 있다면,

조선도 거기까지 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 스럽다.

 

 

8. ‘낙랑군 재난하설’과 ‘낙랑군 재평양설’이 보는 갈석산의 위치

(1) ‘낙랑군 재난하설’이 보는 갈석산

윤내현을 비롯한 ‘낙랑군 재난하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고조선의 갈석산을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보고 있다. 『태강지리지』 등에서 한나라 낙랑군에 갈석산이 있다 하였고, 현재 갈석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난하 하류에 있으므로, 이곳이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역사서에 나타나는 갈석산은 여러 개가 있으므로 『태강지리지』 등에서 말하는 갈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라는 검증이 필요한데 이러한 과정이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고대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지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아니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등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 ‘가짜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서기 801년 편찬된 『통전』 이후부터이다.

본래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이다. 송나라 시대 주자학파들은 고대 황하가 난하 하류의 갈석산까지 흘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하윤해설’을 만들었다.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서 하북성 진황도시까지 500여리의 바다가 본래는 육지였고 황하가 난하 하류의 갈석산까지 흘렀는데, 그 500여리의 육지가 침몰하여 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할 갈석산이 지금처럼 황하 하류로부터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현대과학에 의하면 발해 부근의 육지 500여리가 바다 속으로 빠졌다는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발해 주변은 황하에 의한 토사의 퇴적으로 육지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현대과학은 시대별 황하 하류 및 해안선의 위치를 모두 밝히고 있으며, 황하는 하북성 천진시보다 동쪽으로 흐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구하윤해설’은 틀린 학설이며, ‘구하윤해설’에 기반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 갈석산’이다.

 

▲ 중국 하북성 양평의 녹가장묘. 전형적인 고구려 태왕의 복색을 갖추고 있다.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에는 고구려태왕은 백라관을 쓴다고 한다. 위 묘의 주인의 복색 중 머리부분을 보면 명확하지 않으나 투명의 백라관이 흔적이 보인다.

(2) ‘낙랑군 재평양설’이 보는 갈석산

현 강단사학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들이 평양지역에서 발굴 조사한 낙랑유물들 핵심근거로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고 있다. 유물들을 토대로 평양지역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확정하였는데, 문제는 중국의 문헌기록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서』와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고,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평양지역에서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단사학자들은 『진서』와 『태강지리지』의 갈석산과 만리장성 관련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앞에서 사료 J-1에서 보았듯이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낙랑군 수성현을 해설하면서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 설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이병도는 아래의 사료 L-3에 나오는 『진서』의 낙랑군 수성현조에서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秦築長城之所起)’라고 하는 기록을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맹랑한 설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병도가 이렇게 중국의 정사인 『진서』의 기록을 부정한 것은 평양일대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문헌기록을 부정하는 이병도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강단사학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병도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진서』의 기록을 부정한 반면 현 강단사학계에서는 ‘낙랑군 교치설’을 만들어 『진서』와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낙랑군 교치설’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아래의 사료 L-1을 근거로 삼고 있다. 요동의 장통이 낙랑‧대방 2군을 차지하고 고구려 미천왕(을불리)와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백성 1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자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 북한 평안도에 위치한 안악3호분의 벽화묘의 주인모습. 위 중국 하북성 남단, 산동성 북단의 양평에서 나온 벽화묘의 주인과 복색이 같다. 왜 같은 것일까? 고구려의 강역을 가늠할 수 있다. 고구려가 다물한 조선의 강역도 추정할 수 있다.

L-1

“요동의 장통이 낙랑‧대방 2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였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해결이 되지 않았다. 낙랑군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다.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資治通鑑』卷八十八, 晉紀十

L-2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연이 모두 제멋대로 요동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ㆍ창려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했다. 함녕 2년(AD 276년) 10월, 창려ㆍ요동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현 18,100호이다.” 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晉書』卷十四, 志第四, 地理上, 平州

L-3

“낙랑군은 한나라가 설치했다. 6개현을 다스리며, 3,700호이다. 조선현: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누방현. 사망현.” 樂浪郡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晉書』卷十四, 志第四, 地理上, 平州, 樂浪郡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 기록은 서기 313년 4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현 강단사학계는 요동의 장통이 본래 의거하였던 낙랑‧대방의 위치를 평양일대로 보고, 313년 모용외가 새로 설치한 낙랑군은 당시 모용외의 근거지인 요서(창려)일대로 보고 있다.

즉 서기 313년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서 요서지역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낙랑군 교치설’이다. 이 ‘낙랑군 교치설’을 근거로 하여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는 기록은 본래의 한나라 낙랑군에 관한 기록이 아니고 313년 요서로 교치된 후의 낙랑군 관련 기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강단사학계의 ‘낙랑군 교치설’은 두 가지 모순점을 안고 있다.

첫째, 『태강지리지』는 위‧오‧촉 삼국을 통일한 서진 초대황제인 무황제 태강(太康, 280~290)년간에 편찬된 지리서이므로, 한나라 낙랑군이 요서(창려)로 이동한 서기 313년 보다는 30여 년 전에 편찬된 책이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관련기록을 313년 요서로 교치된 후의 낙랑군 관련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둘째, 『자치통감』(사료 L-1)은 ‘요동의 장통이 낙랑‧대방 2군에 의거했다’고 하여 낙랑‧대방 2군이 요동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 강단사학계에서는 이곳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낙랑‧대방 2군 또한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다.

당시의 요동 위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료가 『진서』「지리지」 ‘평주’의 기록이다(사료 L-2). 이 기록에 의하면 공손씨 정권이 요동을 차지하였는데,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하고 그곳에 요동ㆍ창려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개 군을 설치하고 평주로 삼았다. 서진 또한 위나라를 이어 요동지역에 요동ㆍ창려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군국을 두고 평주로 삼았다. 즉 서진의 평주가 바로 『자치통감』(사료 L-1)에서 말하는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서진의 평주는 어디인가? 사료 L-2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공의 기주지역’이나 ‘주나라의 유주’ 및 ‘한나라의 우북평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 정사인 『진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의 요동지역이자 서진의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지역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는 『진서』에 나오는 서진의 평주를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있다. 강단사학계의 주장대로라면 가마득한 중국 하나라와 주나라 시절부터 한반도 평양일대가 중국 땅이었으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강단사학계가 『진서』의 기록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진서』에서 기록한 서진의 평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자치통감』(사료 L-1)에서 요동의 장통이 의거했던 낙랑‧대방 2군은 하북성지역이다. 마찬가지로 서기 313년 장통이 창려(요서)의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새롭게 낙랑군을 설치하였는데 창려 또한 서진의 평주소속이었다. 그러므로 본래의 낙랑군이나 313년 새로 설치한 낙랑군은 모두 요동지역으로 서진의 평주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하북성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단사학계에서 장통이 의거했던 낙랑‧대방 2군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보는 ‘낙랑군 교치설’은 중국 정사인 『진서』의 기록과 맞지 않은 주장이다.

『태강지리지』와 『진서』등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고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이다. 보정시에는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버젓이 남아있고, 앞에서 ‘4,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 항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통전』(사료 D-1)과 『무경총요』(사료 D-2)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났다. 그리고 장성유지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태강지리지』와『진서』 등 중국의 수많은 사서들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들은 평양지역에서 발굴 조사한 유물들을 근거로 평양지역에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다고 한다. 하북성 보정시 지역과 한반도 평양지역은 발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3,000여리나 떨어진 먼 곳이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을까?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이 고의로 자국의 역사 영토을 왜곡‧축소하여 기록하였을까? 아니면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민족의 역사 영토를 고의로 왜곡‧축소하여 기록하였을까?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갈석산 관련 글은 여기서 마무리 한다. 다음호에서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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