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매국사학 청산하지 못해 독립운동이 허사가 되어 버리다...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은 동전의 양면...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 부패의 뿌리는 친일식민사학...

친일식민사학 청산하자면서,

악질 친일파, '오카모토미노루(박정희)'를 떠 받드는 사이비 역사팔이들은 가라...

 

 

왜구의 난동이 자리잡아가던 서기1920년 11월 2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백발의 노인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목숨을 거두려는 왜구검사가 노인에게 물었다.

“느낌이 어떤가?”

죽음을 초월한 노인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삭히며 답한다.

 

단두대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부는구나(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는데, 어찌 느낌이 없겠는가(有身無國 豈無感想)!”

 

이 노인은 단두대에 올라서서 오히려 봄바람을 느끼고 있다. 사형을 집행하는 이 날은 11월 29일이었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이었다. 차디찬 서대문형무소 사형 집행 장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추위가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봄바람을 느끼고 있다. 왜구의 폭압을 비웃고 이 세상을 뛰어 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자의 모습을 본다. 이 순간 이 노인 앞에 봄바람으로 비유되는 영원한 생명의 문이 드러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내 다시 시공간으로 돌아온다.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는데, 어찌 느낌이 없겠는가!”

이제는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으로서, 준엄하게 왜구검사를 꾸짖고 있다.

 

사형선고가 있기에 앞서 재판을 받으면서 이 노인은 이렇게 왜구 판사를 꾸짖었다.

“일본은 불의로써 우리나라를 병탄했다. 이는 세계의 인도人道가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조선의 국민으로 너희들의 노예로 복종할 수 있겠는가. 일본은 조선을 지배할 능력이 없으며, 이른바 동화란 유치한 꿈(稚夢)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노인이 당시 64세의 강우규 의사다. 사이토 마코토가 3대조선 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하여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폭탄을 던졌다. 서기1919년 9월 2일 하오 5시쯤이었다. 이 폭발로 사이토는 살아남고 37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강우규 의사는 노예가 아닌 주인의 길을 갔다.

보통 한 나라가 새로 들어설 때 앞선 나라의 모순과 적폐를 일소한다. 앞선 나라가 저지른 잘못은 모두 청산되고 새로운 가치와 제도가 새 나라의 기틀이 되고 국시가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그렇지 못했다. 8.15해방 후 우리는 광복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독립운동, 광복군 세력이 주도하여 새로운 가치와 제도를 토대로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역사는 거꾸로 흘러갔다. 비리와 부패로 나라를 부셔버린 소중화 조선 왕족과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이 중심이 되어 그 부서진 나라를 일제에게 팔아먹었다. 그리고 이들이 왜구난동기에 왜구의 개, 돼지 노릇하며 동포를 죽이고 탄압하다가, 왜구가 물러간 주인의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지배세력이 된 것이다.

▶ 왼쪽이 대한 광복군 장준하다. 오른쪽은 일본군 박정희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정반대의 길을 갔다. 장준하는 조국광복, 주인의 길을, 박정희는 매국, 노예의 길을 갔다. 그리고 해방 후, 둘은 물과 기름처럼 공존하다가, 정권잡은 박정희에 의해서 장준하가 마지막으로 희생되었다. 이 후 박정희는 대일종속경제구조를 고착시키고, 독도를 일본에 넘겨 주었으며, 서울시간을 동경시로 바꾸었으며, 친일파를 정계, 관계, 군대 등 모든 요직에 등용하였다. 또한 일본의 명치유신을 흉내내어 '10월유신'으로 우리의 고유전통문화를 파괴하였다. 더구나 '단군기원'을 없애버리고 서력기원으로 통일 시켰다. 박정희시절에 우리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이 북한에 있었다고 외워야 했고, 국사 시험문제에 단골로 나왔다.

마땅히 모두 청산되어야 할 친일매국세력이 거꾸로, 독립을 위해 사선을 넘나들며 싸웠던 독립, 광복운동세력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 하에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약산 김원봉 등 독립운동 핵심 세력이 청산되었다. 그리고 광복군 장준하가 일본군 박정희에 의해 마지막으로 청산되었다. 강우규 의사의 목숨을 던진 희생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이다. 이런 역사는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에 따라 왜구제국주의 침략정책에 맞게 구축된 왜구난동기의 온갖 폐습과 제도가 청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대한민국의 문화와 제도가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법조,예술, 학문, 민속 등에 왜구가 뿌려놓은 독소가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특히 국사는 일제가 뿌려놓은 식민주의사관이 그대로 존재한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더욱 강고해져 가고 있다. 그 현장을 우리는 지난 서기2016년 3월부터 6월까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개최한 이른바‘고대사시민강좌’를 통해 목도하였다. 그리고 9월 7일부터 같은 장소에서 조선총독부를 대신한 식민사관의 역사침략을 다시 목도하고 있다.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가장먼저 한 작업이 역사침략이었다. ‘정한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한국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당시 소중화 조선은 완전히 자정능력을 상실한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따라서 조선이 살아나려면 왜구가 들어와 식민 지배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왜구는 우리역사에서 찾았다. 우리역사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인 한사군이 설치되어 문물이 발전하였고 이어 왜구의 임나일본부가 식민통치를 함으로써 반듯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식민지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왜구는 중국의 모든 문헌사료와 소중화 조선의 중화사대노예 사학자료를 동원하였다. 문헌으로 증명이 안 되는 것은 유물과 유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식민사관을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집단이 고스란히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자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지만 정작 친일파의 정점에 있는 매국식민사학은 학문의 탈을 쓰고 더욱 왕성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자고 외치는 역사문제연구소 같은 이른바 진보집단이 ‘역사비평’을 통해 친일식민사학계와 한패가 되어 매국식민사학을 적극 옹호하고 나서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을 정도다.

중국은 서기20세기 후반 들어 국력이 신장되자 중국내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의욕을 잠재우고 하나의 중국을 확립하고자, 새롭게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동북지방에는 이른바‘동북공정’이라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만주와 대륙의 우리역사를 지우고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이를 위해 문헌사료를 왜곡하고 유물, 유적을 조작, 날조하였다. 특히 중국은 한나라 식민통치기관,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는 근거를 왜구가 창작하고 국내매국사학이 완성해 가는 식민사관에서 찾아냈다. 그래서 서기313년까지 북한 일대가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지배한 중국 땅이라고 한다.

지금 동북아시아는 역사전쟁 중이다. 매국식민사학계는 역사학은 객관적이고 순수하고 실증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뒤집어 보면 일제식민사관과 중국동북공정사관과 같다. 이는 역사학이 아니라 침략과 패권주의에 입각한 정치이념일 뿐이다. 가장 비객관이고 불순하며 비실증적인 것이다. 매국식민사학의 주장이 설사 옳다고 해도, 우리 주변은 객관적이고 순수하고 실증적인 역사학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지 않다.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매국식민사학은 지금 적전敵前에서 스스로 무장해제하자고 한다. 그 결과 동북공정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아,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정의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가 누구인지 확인해 주는 정체성의 표준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대노예의 식민사관의 마수에 걸려 혼미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온갖 비리와 부패 그리고 세월호 같은 참사의 뿌리에는 사대노예의 식민사관이 똬리를 틀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물러갔으나 일제의 역사침략은 국내매국식민사학계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으며 더욱 거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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