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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역사4 구미정 교수, 잊혀진 만주 독립운동사 조명하다.도대체 조선 사람이 왜, 일본 첩자노릇을 하는 것일까...
김명옥 | 승인 2016.10.21 13:28

김명옥 전문기자

 

"늙은이가 눈 어두워서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우연히 읽으니,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른 눈물 옷깃을 적시네."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④ 구미정 숭실대 초빙교수 강연

-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든 사람들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의 네 번째 주제는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강연를 맡은 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는 서간도와 북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든 ‘사람들’에 방점을 두었다고 했다. 서간도의 석주 이상룡과 북간도의 규암 김약연을 중심에 두고 그 일가와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독립운동의 꿈을 일구어 나가는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이다. 강연을 듣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암살의 예를 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암살’의 시간 배경과 등장인물의 출신, 특정 장면 등을 통해 석주 이상룡 일가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식이다.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졸업생인 ‘속사포’의 출신 배경은 신흥무관학교의 창설자인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 일가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는 신흥무관학교로 10년 동안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구미정 교수는 이 땅의 지식인은 두 층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무릇 지식인이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실천하는 사람인데, 이완용은 어용지식인으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철저히 일신의 안위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이상룡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자 적극적 저항을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 구미정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다. 구미정 교수는 이날, 만주로 대거 망명한 선각자들이 얼마나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룩하고 독립운동의 이상향을 제시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전형적인 유림이었던 이상룡이 혁신유림으로 변모한 시기를 구미정 교수는 ‘50세 무렵’이라고 말한다. ‘우연히 읊는다’라는 시를 통해 생각의 전환을 보여준다고 한다. “주자학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50여 년 동안 공맹서를 열심히 읽어 왔는데, 내가 시세를 잘 못 읽어서” 역사는 또 힘의 논리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심지어 조선 사람이 일본의 첩자 놀이를 한 것을 보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를 고민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상룡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다윈, 토마스 홉스, 제레미 벤담 등을 읽고 나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데, “천하가 다 공공의 것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물음을 던져 그것의 답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망명을 떠나기 전에 노비문서를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키고, 이들이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 준 뒤에 망명하는데, 일제의 눈을 피해 이상룡 일가와 일송 김동삼 일가 그리고 백하 김대락 일가 150여명이 집단 망명을 떠나야 했기에 이들 일가가 서간도에 다 모이기까지는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상룡 선생은 안동에 유인석이 협동 학교를 설립을 추진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김대락은 자신의 집 50칸을 학교 교실로 사용하라고 내놓았다. 김대락은 이상룡의 처남이다. 김대락 선생은 60세에 생각을 바꾸는데 그 배경을 시로 남겼다. 늙은이가 눈 어두워서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우연히 읽으니/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른 눈물 옷깃을 적시네. 구미정 교수는 ‘대한서’는 ‘독 대한협회 서 유감’으로 이상룡이 몰래 갖다놓은 대한협회 소식지라고 설명한다.

김대락에게 여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 우락은 이상룡의 처이고 김락은 퇴계 이황 선생 11대손인 향산 이만도의 며느리다. 이만도는 나라가 망하자 매천 황현 선생처럼 자결했고, 김락의 남편 이중업은 독립운동을 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락의 사위는 파락호로 알려진 김용환이다. 모두 재물을 도박으로 탕진하고 심지어는 딸이 시집갈 비용까지 도박으로 날린 인물로 알려졌다. 그런데 도박으로 날린 돈은 독립운동자금이었으며, 김용한은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게 구미정 교수의 설명이다. 김락 여사는 독립운동으로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잃고, 자신은 일제의 고문으로 두 눈을 실명해 홀로 세상을 헤매다 만 67세, 1929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상룡은 단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상룡은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보면서 일국의 권리가 모두 타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체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는데 나라가 망해가는 데 단체라도 살아야 정신을 올바르게 차릴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단체가 있어야 능히 내부 세계를 발달시킬 있고, 단체가 아니라면 능히 외부 세계와 교통할 수 없다. 단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상룡은 대한협회 안동 지회 회장으로 취임할 때 “나라는 백성이 공동 재산이고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다. 국사는 국민이 다스리고, 국법은 국민이 정한다”고 했던 말에서 ‘근대국가의 국민’의 정의를 엿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오늘날 제국주의가 성행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군국주의를 취하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다. 우리 협회의 사람들은 모두 마땅히 국방을 제일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무릇 우리 협회가 설비한 학교는 모두 군대식 체조를 채택하도록 한다.”라는 글을 써서 대한협회 회관에 게시했는데, 이때부터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를 차리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 구미정 숭실대 교수가 만주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열강하고 있다.

만주로 집단 망명한 한인들은 1911년 경학사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 문을 열었다. 경학사는 농사와 공부를 표방했지만, 사실상 군정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구미정 교수의 설명이다. 만주에 이미 군정부가 있는 상태에서 1919년 4월 11일 임시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들어서고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경학사 사장인 이상룡에게 1.외교, 2.내무 3.재정 4.군사 순서로 독립운동의 주안점을 두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본 이상룡은 “이순서가 거꾸로 된 게 맞겠네 1.군사 2.재정 3.내무 4.외교”라고 답장을 써 보내는 한편, 만주에 무장투쟁하는 사람들을 잘 설득해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했다. 이미 존재한 군정부는 격을 낮춰 서간도는 서로군정서로, 북간도는 북로군정서로 임정 산하의 군정서가 된 배경도 설명하였다. 구미정 교수는 이상룡의 리더십을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한편 그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백주년 행사를 소개하면서 음력으로 5월 14일, 양력으로는 6월 10일에 학교가 열렸는데 “이날을 우리나라 국군의 날로 삼았으면 바른 역사의 한 단추를 바로 세웠을 터인데”라며 “우리는 신흥무관학교 역사를 괄호 안에 넣어 버렸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구미정 교수는 북간도 독립운동사는 김약연 선생의 절친인 김하규, 문치정, 남위언 등과 함께 북간도 화룡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무려 4개 가문 24세대 141명이 함께 이주해 장재촌에 터를 잡았고 이들보다 3년 전, 1900년에 자동이라는 곳에 이주해 살던 윤재옥도 가족을 이끌고 장재촌에 합류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이룬 한인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하규는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할아버지고 문치정은 문익환 목사의 할아버지이며 윤재옥은 윤동주 시인의 증조할아버지다. 김약연은 1901년에 자신의 호를 따 ‘규암재’를 설립하는데 “백성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백성의 뜻에 의하여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학자들로 그들이 정착한 마을을 1901년에 ‘명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애당초 해동(海東), 동국(東國), 대동(大東) 등 우리나라의 옛 명칭에서 ‘동(東)’자를 따오고, ‘밝다’, ‘밝히다’라는 뜻의 ‘명(明)’자를 합해 지은 이름으로” 민족의 독립을 준비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개인 사숙을 열었다. 김약연 역시 자신의 사숙 ‘규암재’에서 처음 맹자에 입각해서 신(信) 식(食) 병(兵), 전인교육사상의 유교식 교육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1906년 서전 대야에 설립된 서전서숙의 교육, 철학, 역사, 지리, 국제법, 군사 훈련 등 근대적 교육 내용을 보고 김약연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면서 1907년에 서전서숙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일제는 임시간도출판소를 통해 학교 교사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는데, 교사들에게 매달 20원씩 줄 터이니 학교를 자기네에게 넘기라는 일제의 회유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규암재’가 서전서숙을 인수해서 명동학교로 거듭났고 유교학자였던 김약연은 상동청년학원에서 파견된 정재면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명동학교의 성격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학전’이 있다. 학전은 명동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공동 농사를 짓되, 각 가정마다 10일조로 땅을 내는 것이다. 학전은 교육사업으로 써야하고 이때의 교육사업이란 무장투쟁을 위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다. 문치정, 김약연 등이 중국인들에게 땅을 넓게 샀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학전은 50만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길동식산회사를 설립했는데 “명동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누구도 가난한 빈농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게 그 취지였다는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맞서서 사유재산제도를 억제하면서 공동소유를 기반으로 해 서로 상부상조 하는 것이 길동식산회사의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북간도는 국민회로 발전하고 이것이 오늘날 연변자치주의 토대가 되었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

북간도에는 명동학교를 비롯한 종교계 학교가 99개교가 있었는데 70여개교가 기독교학교다. 그런데 명동학교 교가에 “한 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 끼치신 이 터”라는 노랫말이 나오는 것처럼 학교뿐 아니라 교회도 단군초상과 태극기를 같이 걸어두고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구미정 교수는 이 명동촌 용정촌을 ‘다종교 다문화가 꽃피는 조선산 기독교의 평화로운 땅’으로 표현한다.

▲ 강의를 마치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운 방청객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날 강의에는 젊은 시민들이 많이 참여하여 바른 역사를 밝히는데 힘을 보탰다.

국내에서 울려 퍼진 3·1 만세운동이 용정에서는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났다. 용정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참혹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미리 중국의 허가를 받은 8천명이 일본 영사관을 향해 진군할 때, 일제는 ‘총질’을 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게다가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의 패전으로 자존심이 상한 일제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기술’은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함에도 간도에는 무장투쟁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만주는 “단군조선의 얼이 있는 우리 민족의 젖줄이고, 고구려의 상무 정신이 있는 곳이며, 일본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 우리 민족 자존심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석주 이상룡은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약연은 “삶이 내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발적 망명, 자발적 디아스포라를 택했던 그분들이 남긴 말들을 뼛속깊이 새겨본다는 말로 마무리된 이 날의 강연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만큼 더욱 깊은 울림을 주었다.

구미정 교수의 강연은 미사협, 우당기념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오는 10월 26일 시민강좌는 이석연 전 법제처장의 ‘헌법적 차원에서 본 대한민국 건립의 정통성’이란 주제로 열릴 예정이다.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는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교대 교육회관에서 열린다.

김명옥  koreahit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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