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사욕 정권유지를 위해, 외국군대를 끌어 들여 자국민 학살한 민씨정권...

김명옥 전문기자

 

바른역사 생민강좌 제2강,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강연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일제, 대동아전쟁으로 궁핍해도 식민사관예산은 안깎아...

일본우익 공작금 한국내 인문사회과학연구자금 명목으로 들어와 암약...


‘일제식민사관 극복과 민족정체성 재정립’을 위한 바른역사아카데미 두 번째 시민강좌가 10월 5일(수) 서울교대 문화관에서 열렸다. 이덕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우리나라는 근현대사와 고대사가 하나다”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점령하면서 우리 고대사를 그들의 틀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대사는 근현대사라는 것이다. 이덕일 소장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 역사를 왜곡하였는데, 조선사편수회 회장은 학자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다고 전한다. 정무총감은 군사통수권을 제외한 행정 및 사법을 통괄하는 직책으로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와 행자부 및 법무장관 등 비롯한 온갖 장관직을 겸임하고 있는 총독부 2인자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조선사편수회 회장이란 사실은 조선사편수회가 학술조직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 지난 서기2016.10.05. 서울교대, 종합문화관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체성 확립을 위해 마련된 '바른 역사 아카데미' 2번째 강연이 거행되었다. 강연에 앞서, 참석한 생민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한 광복회 서울지부가 주관하고 미래로가는 바른역사 협의회(미사협) 등이 후원하는 이 생민강좌는 주류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진행되는 강단주류사학의 '한국고대사학회'가 주관하는 '고대사시민강좌'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장소만 달리하여 실시되고 있다. 돈과 조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류강단사학과 비교해 볼 때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덕일 소장은 일본의 역사왜곡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본이 대동아전쟁말기에 연료가 없어서 소나무 송진까지 사용하던 시기에도 조선사편수회 예산은 10원도 안 깎았다”면서 그 이유를 “그들이 패전을 하더라도 다시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역사관을 잡아놔야겠다는 장기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첫날 특별강연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현 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의 말을 빌려 “일본 우익자금이 국내에 상당히 들어와 있고 그 자금은 주로 인문사회학에 많이 뿌려졌으며 그 결과 독도가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국학자들이 대폭 늘어났다”고 말한다.

매국식민사학자들 고대사 따로 현대사 따로 사관으로 우리역사 난도질...

이덕일 소장은 “학문은 일이관지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을 강조한다. 특히 역사관은 일이관지가 중요하며 고대사나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같아야 하는데 우리는 고대사 따로 근현대사 따로 본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역사를 바라 볼 때, 잘못된 부분은 반성하고 그 토대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대원군은 양반에게 호포를 받고 서원을 철폐 하는 등 개혁적인 정치가였지만, 개혁에 실패했다. 그 이유가 왕권을 강화하고, 성리학 사회를 다시 재건하는  과거지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종의 친정은 실제적으로는 민씨 일가의 집권으로 이어졌는데, 이들은 대원군과 무조건 거꾸로 하자는 게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고종의 아관파천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했다. 자국의 왕이 외국 공사관으로 도망 간 본질적인 이유는 갑오개혁에서 추진하던 “헌법질서에 속박되기 싫어서”라는 매천 황현의 말로 설명했다. 온건개혁파가 추진하던 법제개혁은 반상을 철폐하고, 문무차별 및 조혼금지를 폐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등 조선의 많은 문제를 개혁했다. 갑오개혁은 헌법을 제정하고 법률에 따라서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로 가야한다는 의미인데 고종은 “끝까지 전제군주제를 고수 하려는 생각으로 아관파천을 단행한 것”이라는 것이다. 동학에 대해서도 이덕일 소장은 유학의 사대주의에 눌러 있던 우리 전통사상, 우리가 주인이라는 전통사상이 되살아 나 동학과 접맥 되었으며 조선이 걸어야 했던 반봉건과 반외세의 지향점을 정확히 실천한 것이라고 말한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날 식민사학은 좌,우를 떠나 국가존망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자기 나라백성을 죽이자고 외국군대 끌어들인 민씨일족,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나라 백성을 죽이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고종 때문에 결국 을사 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반발해 전국에서 의병이 거세게 일어난다. 이에 일본은 남한대토벌작전을 실시하는데 이덕일 소장은 남한대토벌작전에 한국지역 감정의 뿌리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우리 역사에는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 남인의 정계 진출은 막았어도 호남을 홀대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남한대토벌작전의 작전계획서를 보면 토벌 대상지역이 전남과 전북이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의병이 마지막까지 저항한 곳이 전라남도와 북도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덕일 소장은 “호남 홀대처럼 우리나라의 잘못된 것의 뿌리를 찾아보면 그 대부분 일제에 있다”라고 말한다. 의병 토벌이 끝나자 노론과 일진회는 나라를 팔아먹는 경쟁이 벌이다 노론이 일진회를 따돌리고 나라를 팔아먹는데 성공한다고 이덕일 소장은 설명한다. 나라를 팔아먹고 훈장과 작위를 받은 사람들 76명 중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의 당파를 분석해 보면 남인 0명, 북인 2명, 소론 6명, 노론 56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 노론 당수 이완용(1858-1926)                             ▲ 일진회장 이용구(우), 송병준(좌)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의 효시는 미국이 아닌, 독립운동가의 모임 '경학사'에서 나와...

당시 국제 정세 상 대한제국은 도저히 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고 영국과는 영·일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과는 카스라 테프트 밀약을 맺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신에 일본이 한국을 차지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역사의 반전이 일어난다. 사대부들이 집단으로 망명해서 만주 유하현 횡도천에 모인다. 강화도의 양명학자들과 서울의 이회영 집안, 그리고 안동 이상룡 집안과 김대락 집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만주의 추가가 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었다. 집단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새로 세울 나라에 대한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석주 이상룡이 쓴 ‘만주기사’라는 시를 보면 “정부의 규모는 자치를 명분으로 하고, 삼권을 분립한 것은 문명사회를 본뜬 것”이라고 씌여있다. 이덕일 소장은 독립운동가들이 망명 당시부터 “다시 세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생각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학사에 참여한 대다수가 임정에 가담하는데, 임정의 ‘대한민국임시헌장(1919. 4. 11. 상해)’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이 이런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 추가가와 대고산(경학사)

 

친일파 척살 못한 휴유증, 광복 71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아...

임정은 외교활동만 한 것이 아니다. 만주의 삼부(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중 참의부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라는 것이다. 참의부 제1중대는 1924년 5월 압록강에서 총독 사이토 마고토를 저격하는 사건도 일으켰다. 이처럼 국경 근처는 늘 전쟁터였다고 이덕일 소장은 설명한다. 만주 길림성 중심으로 활동한 정의부의 정이형이 광복 후 민선의원이 되어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초안>를 제출한다. “부일협력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되어 있다. 공민권 박탈자는 선거권, 피선거권을 빼앗는데, 그 대상자들은 군부의 장교, 하사관, 사법관리, 경찰 관리는 물론 행정 각 부분의 지도급 관리, 주요 산업 부분의 간부 및 직원도 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정이형은 “부일협력자에 대한 공민권박탈은 가장 가벼운 처벌이다. … 처단 않으면 그들이 정권을 잡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그 말대로 되었다는 것이 이덕일 소장의 설명이다.


북만주의 독립운동은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와 홍암 나철이 세운 대종교가 중심이다. 대종교인 김교헌은 규장각 부제학으로 뛰어난 유학자였다. 그는 나라가 망한 이유를 유학의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유학을 버렸더니 단군이 보였다고 하였다. 단군은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본다는 뜻이라고 이덕일 소장은 말한다. 일본과 식민사학이 단군만 나오면 죽이려고 광분하는 이유는 역사 전쟁의 중심에 단군이 있는 연원이라는 설명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대한민국23 년: 1941년 11월 29일)’은 해방 후 고국에 돌아가 새로 세울 정부의 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연원을 두고 있다. 삼균제도란 정치·교육·경제 균등화를 의미한다. 홍익인간과 이화세계가 우리 민족의 최고 공리라고도 언급되어 있다. 임정의 여당인 한독당이 해방 직후 발표한 경제 정책도 ‘경제의 균등사회로 복지생활을 보장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삼으면서, 국민이 현재 사유한 토지와 중소규모 사업 기업의 토지 등은 법률로써 소유를 보장하고, 토지국유는 점진적으로 실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정신이라는 것이 이덕일 소장의 설명이다.


이덕일 소장은 강연에서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라는 주제를 통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로 망명해서 경학사를 세운 사람들이 대한민국이란 공화국을 세운 뿌리’임을 강조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임정에서 원칙으로 삼은 토지국유제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덕일 소장은 공산주의 식의 토지국유제가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소유한 토지가 전국의 50% 가까이 되는데, 이를 국유화하자는 것이며, 친일의 댓가로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친일파의 토지를 몰수해서 국유로 삼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가진 토지와 중소기업이 가진 토지는 소유권을 법률로써 보장한다는 뜻이라며, 이것이 지금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이 되살려야 할 정신이라고 답변했다.

▲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해에 도착한 임정요인 환영식. 사진 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 가운데 태극기를 두손으로 잡고 있는 소년이 지난 첫번째 연사로 나선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다.

바른역사아카데미는 강좌 동영상을 미사협(미래로 가는 바른역사 협의회), 우당기념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이트와 유튜브를 통해서 제공할 예정이다. 바른역사아카데미로 검색하면 강좌 동영상을 찾을 수 있게 한다고 한다. 바른역사아카데미 세 번째 강좌는 10월 12일(수)에 이준식 연세대연구교수가 ‘임시정부의 정치·경제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이란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