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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이석영 선생독립투쟁에 전 재산 바치고 이국 땅에서 순국
허성관 | 승인 2015.10.13 17:17
이석영(1855~1934)

6조원 상당의 재산을 처분, 독립 운동에 나서다

일본이 조선을 1910년에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자 차관급 벼슬을 지낸 한 고위공직자가 나이 56세에 지금 가치로 수 조 원이 넘는 자기 전 재산을 팔아 다섯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투쟁에 나섰다. 만약 지금 나라가 같은 처지에 직면하면 이런 분이 나올 수 있을까.

이 분이 영석(潁石) 이석영 선생이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의 6형제 중 둘째이시다. 이 형제들의 가문은 당시 조선 최고 가문으로 소위 삼한 갑족이었다. 이석영 선생은 족숙인 전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양자로 들어갔고 양부의 만석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 재산을 처분해 친가의 형제들과 함께 독립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들 형제들의 가문은 왕산(旺山) 허위( 許蔿 1855-1909),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선생의 가문과 함께 한국 최고의 명문이다. 자신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생명과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에 매진했기에 명문 중에 명문인 것이다.

가족들이 소중하지 않고, 목숨이 두렵지 않고, 재산이 아깝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에게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고 독립투쟁에 나섰기에 이석영 선생은 지도층의 한사람으로 솔선수범해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을 다한 민족의 사표이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가 이만큼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석영 선생 6형제가 처분한 재산 대부분이 이석영 자신의 재산이었다. 당시 40만원의 거금이었다고 한다. 쌀값을 기준으로 보면 지금의 600억원에 상당한다. 최근 이석영 선생 가문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당시 처분한 토지가 726필지 882만2천644㎡(267만평)이다.

이를 시가로 환산하면 최소한 6조원이 넘을 것이다. 대부분의 땅이 지금의 남양주, 양평, 파주, 서울 등지에 있었다. 이들 지역 땅 값이 비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명동의 땅 2만6446㎡(8천평)은 망명하려는 사실을 일제에 감추기 위해서 처분하지도 못했고 일제 총독부로 넘어갔다. 공시지가로 이 땅의 가치가 대략 1조원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장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다

 

이석영 선생은 1911년 서간도 유하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쾌척했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로서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모두 열망하던 학교였다. 이 학교는 폐교될 때가지 10년 동안 약 3천500명의 독립군 장교를 길러냈다.

1920년대의 대일 광복전쟁, 특히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독립군 중간 간부들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이후 무장항쟁이나 의열투쟁에서 기간 장교들은 신흥무관학교 동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일 광복군 간부 중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신흥무관학교는 바로 광복전쟁의 간성을 길러낸 학교다. 국가가 적에게 침략을 받았을 때 가장 핵심적인 대응은 바로 무력투쟁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석영 선생이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석영 선생은 신흥무관학교의 교주, 즉 재단 이사장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석영 선생은 대일 항쟁기 무장 항쟁의 기틀을 놓은 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공화정의 씨앗을 뿌리다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시기에 경학사(耕學社)가 창립되었는데 여기에도 이석영 선생이 필요한 재정을 담당했다.

경학사는 신흥무관학교 주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자치기관으로 창립됐다. 초대 사장은 이상룡 선생이었다. 이 지역에 온 인사들은 조선에서 미리 기획해 집단으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양명학을 공부한 강화학파, 신민회 회원들, 개혁적인 유림이 그들이었다.

이석영 선생은 이들 중에서 살 길이 막연한 사람들에게 농사지을 땅과 양식을 마련해주어 현지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경학사가 자치기관이었다는 사실은 바로 조선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학사는 후일 부민단(扶民團), 한족회, 서로군정서로 진화해 나갔다.

이런 발전에 대해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자는 “2천호의 조선 민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며 소ㆍ중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작은 나라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민주공화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애국지사들의 광복투쟁은 조선 왕실을 부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민중이 최초로 정치의 주체가 되는 회기적인 사실이다. 이렇게 태동한 민주공화정의 정신은 임시정부로 이어지고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계승된 것이다. 이 민주공화정이 가능하도록 씨앗을 뿌린 분 중 한 사람이 바로 이석영 선생인 것이다.

전 영의정 이유원이 족제 이유승의 아들인 이석영을 빼앗아 양자로 들였다는 매천 황현의 기록은 선생이 촉망받는 온후한 청년이었음을 반증한다. 나이 삼십에 대과에 급제한 후 정언과 수찬 등 청요직을 지내고, 홍문록에도 추천되고 순조롭게 승진한 것으로 보아 강직하면서도 학문도 깊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려수필(騎驢隨筆)은 “공이 벼슬에서 크게 성취할 뜻이 없더니 마침내 사직하고 돌아와 은거하였다(公無意進就 遂辭歸不出世)”고 기록했다. 이런 평가로 미루어 보면 선생은 강직하면서도 야망이 없이 유유자적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하며 훈련받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재산을 처분한 자금이 소진되자 이석영 선생의 삶은 신산해졌다. 만주 유하현에 10년 정도 거주한 후 심양, 북경, 천진, 상해로 이거했다. 사실은 방랑이었다. 이 무렵 선생의 나이는 70대였다. 아들과 조카들을 의지하여 옮겨 다녔지만 가난을 피할 수 없었다.

삼한갑족의 후손에 고위공직을 지내고 만석의 재산을 가졌던 노인이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는 삶을 이어갔다. 전 재산을 조국 광복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여전히 대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민(韓民)’ 1936년 5월25일자는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에 쏟아 붓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하게 생활하면서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의 개식이 없고 태연하여 장자의 풍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삶의 자세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선생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인 이규준(李圭駿 1899-1927)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규준은 북경에서 숙부인 우당 이회영 선생과 의열단원 유자명의 지도하에 사촌 형제들과 ‘다물단’을 조직해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등 독립투쟁에 진력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아버지 보다 먼저 29세에 병사했다. 차남 이규서는 1933년 상해에서 행방불명됐다.

두 아들을 앞세운 슬픔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믿고 아끼고 의지하던 아우 이회영도 1932년에 순국했다. 선생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1934년 향년 80세로 상해에서 사망했고 홍교(虹橋)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선생의 부인은 1936년 상해의 조카 이규홍(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차남) 집에서 82세에 사망했다.

노년의 삶은 고난과 슬픔과 고뇌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자기의 전 재산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가치 있게 쓰신 대가였다. 이석영 선생은 현실에서는 실패한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역사에서는 빛나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

광복 후 46년이 지난 1991년에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됐다. 경기도 소재 재산이 민족수난기에 무장투쟁과 민주공화정의 밑거름이 되었다. 경기도로서는 자랑스럽게 헌창해야 할 분이 이석영 선생이다. 그러나 선생의 근거지였던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1리에는 아련한 옛 이야기로 그 편린이 전해올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글 허성관 (前 행정자치부장관)

허성관  koreahit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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