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청산 못한 업보, 독립전쟁 1등공신, 대종교가 있는 지도 몰라...

대종교를 아시나요?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그냥 된게 아닙니다...

하늘아, 땅아,

산이여, 냇물이여,

역사를 잃어버린 생민들아,

서울 홍은동 언덕위에

쓸쓸하게 잊혀져 가는 대종교, 

그 제단앞에 피눈물을 뿌려라...

 

 

②서기2015년 7월21일(화)-2
  용정(龍井)→화룡(和龍)→청산리전투 유적지⟶이도백하(二道白河)

- 대종교(大倧敎)를 아십니까?

전설의 대략자를 지나 조금 달려 용정 시내에 도착했다. 용정은 ‘선구자’라는 노래로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곳이다. 일송정, 용두레 우물, 해란강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는 이름들이다. 대일 항쟁기 셀 수 없이 많은 전설과 아픔과 추억을 간직한 곳이 용정이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우리 일행은 독립투쟁의 선구자 보재 이상설(1870-1917)이 세운 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과 대성중학교에다 최근 건립했다는 그의 기념관만 보기로 했다.

▲ 이상설(출처-이상설기념사업회)

이상설 선생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이 장관급에 이르렀지만 일찍부터 우당 이회영 선생 등과 함께 신학문을 학습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연해주로 망명했다가 용정으로 옮겨 1906년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선생이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 서전서숙은 1년 정도 존속한 학교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우리 민족교육의 효시였기에 이후 간도지역에서 설립된 많은 민족 학교들은 서전서숙의 영향을 받았다. 선생은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 고난 속에서 민족교육과 독립투쟁에 나섰다. 1914년에는 일제강점 후 최초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연해주에서 조직했다. 아깝게도 향년 47세로 1917년에 연해주에서 사망했다. 선생은 독립투쟁의 대부였다.

서전서숙 터는 조선족 학교인 용정실험소학교로 변했다. 학교를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가 볼 수 없다. 서전서숙 옛터라는 비석만 멀리 보인다. 학교 안에 이상설 정자도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해 아쉽다. 이상설 기념관이 있는 대성중학교는 용정에 있던 6개  중학교가 통합한 학교로 민족 교육의 산실이었다.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고, 시인 윤동주도 이 학교 졸업생이다. 구관과 신관 두 건물이 있는데 신관은 교사이고 구관은 전시관이다. 구관 건물이 격조 있고 아담해서 마음에 든다. 전시관 밖에는 윤동주 시비와 상이 있다. 전시관에는 대일 항쟁기 교육 관련 자료들을 잘 전시해 놓았다. 특히, 이상설을 비롯한 민족교육 선구자들의 사진을 전시해서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전시관은 보기 힘든데 이곳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들이 이런 전시관을 마련해서 후세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자세다. 구관 옆에 이상설 기념관이 있는데 아직 개관하지 않았다. 전시물을 채우는 중이라고 한다. 후일 다시 와서 보리라.

▲서전서숙터에 세운 표석
▲ 대성중학교 구관

냉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화룡으로 향했다. 서남쪽으로 40km를 가야 한다. 가는 길 오른쪽은 야트막한 산이고, 왼쪽과 서쪽으로는 넓은 벌판이다. 해란벌이다. 오른쪽 산비탈에 ‘사과배’ 과수원이 연이어 보인다. 제철이 아니어서 ‘사과배’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 ‘사과배’는 사과와 배를 교잡한 품종인데  배 맛이 나고 이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명품이라고 한다. 이 품종을 개발한 우리 조선족의 정성이 대단하다.

조그마한 고개를 넘자 화룡시 동쪽 경계다. 고운 버드나무길이 2km 정도 이어진다. 버드나무길 끝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여 이면도로 만나는 곳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버드나무길 끝머리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길 오른쪽 산기슭 100m쯤 되는 곳에 대종교(大倧敎) 삼종사(三宗師) 묘가 있다. 대종교 1세 교주 홍암 나철(弘巖,羅哲 1863-1916), 2세 교주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1869-1923),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1921) 세 분의 묘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 선생이 단군교를 중광(重光,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한 단군을 믿는 민족종교다. 지금 “대종교를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별로 없다.

대일 항쟁기 가장 치열하게 독립투쟁에 나선 사람들이 대종교 교도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의 의원 35명을 선출했는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전쟁사에서 찬란한 승리를 거둔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가 대종교였다. 많은 대종교인들이 독립투쟁사에 혁혁한 전과를 남겼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선생 등 함자만 대면 알 만한 애국지사들이 대종교 교도였다. 이러니 우리 민족은 대종교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왼쪽 부터 홍암 나철, 백포서일, 무원 김교헌. 홍암 나철은 백두산의 백봉신사에게서 전해 받은 '삼일신고'를 토대로, 단군교를 일으키고, 끊어진 우리 고유의 선맥을 부활 시켰다. 자신이 스스로 '삼일신고'의 도를 체현하였다. 72일간의 금식수행으로 그는 완전히 환골탈태한 존재로 거듭난다. 이 기운을 가지고 만주일대에 선맥을 부활시켰다.

 
연변 서시 장에서 마련한 제물을 진설하고 인천공항에서 준비해온 소주로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내 삼종사의 명복을 기원했다. 초헌, 아헌, 종헌의 격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일행 모두 음복을 하였다. 대종교에서는 청정한 냉수를 떠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자세한 대종교 예법을 몰라서 유교 예법을 따른 것이다. 개운하지는 않았다. 동행한 이덕일 소장은 비록 현직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의전 주무장관인 행정자치부 장관 집례로 제사를 지냈으니 세 분이 기꺼이 흠향하셨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필자의 기분을 알았던 것 같다.

묘역은 비교적 정갈하게 보존되어 있다. 삼종사는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었다. 홍암 나철과 김교헌 두 분은 대과에 급제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무원 김교헌 선생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우리 민족사학을 개척한 업적을 남겼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대종교를 통해 독립투쟁에 나선 분들이다. 백포 서일 선생은 시종일관 무력투쟁에 진력했고 북간도 독립군을 통합한 북로군정서 총재로서 독립전쟁에서 불멸의 공을 세웠다. 나철과 서일 두 분은 젊은 나이에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순절했으며, 김교헌 선생은 병사했다. 대종교는 만주대륙을 포괄한 교구를 설정하여 포교했고 그 본부도 이곳 화룡에 있었다. 이런 연유로 세 분의 묘소가 여기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1928년에 대종교를 금지했고, 1942년에는 대종교 교도들이 주축이 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간부 10명이 순국하는 소위 임오교변(壬午敎變)을 당했다. 이후 대종교는 교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지금은 안타깝게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 대종교 삼종사 묘


삼종사 묘소를 떠나 서북쪽에 있는 청산리대첩 전적지로 향했다. 거리로는 40km 남짓이지만 1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대로 시원한 포장된 길이 청산리 골짜기 입구를 지나면서부터 황토 길이다. 골짜기 입구는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는데 가운데로 제법 큰 내가 흐르고 입구에 둑을 막아서 수량이 제법 많다. 골짜기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골짜기 깊이가 동서로 25km라고 하니 우리네 계산으로는 60리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양쪽의 산세가 험해 보이지는 않는다. 좀 더 가자 화룡시 산림관리소가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백두산 산록인 이곳의 목재가 좋아서 계획적으로 삼림을 관리하고 있는 증거다.

이 청산리 골에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 사이에  2만여 명의 일제 정규군과 3천여 명의 독립군이 맞붙었다. 백운평, 이도구, 갑산촌, 천수평, 어랑촌 등에서 10여 차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일제는 정규군 1,500여 명이 전사하고 3,300여 명이 부상하는 참패를 당했다. 일제는 병력 25%를 상실했다. 독립군 희생자는 전사 130명 부상 90명이었다. 청산리 대첩이었다. 독립군 부대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 단체 연합 부대였다. 당시 대한의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전의를 불태우게 한 대첩이었다.
이곳 지형을 보니 충분한 사전 정보 없이 대부대를 이 골짜기에 진입시키면 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숲이 울창한 산에 매복해 있는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것은 현대에도 무모한 작전이다. 이런 점에서 독립군 지휘관들은 전투 장소를 탁월하게 선택했고, 일제는 독립군을 얕보고 무모하게 달려든 것이다. 전투 과정에서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밥을 먹으면서 독립군 용사들은 분전했고, 지휘관들의 전술운용도 탁월했으며, 각 부대들이 일사분란하게 협력했다. 당시 이 골짜기에는 조선인이 200여 가구가 화전을 일구어 살고 있었는데 대종교 교도였다. 그런데 학교도 세 개 있었다고 한다. 100년 전 우리 민족의 불굴의 교육열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 청산리 대첩 직후 사진(가운데 앉은 분이 김좌진 장군)


산림관리소를 조금 지나 동산 정상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에서 세운 청산리 대첩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기념탑까지 230여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우리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하고 산화한 독립군들의 명복을 빌었다. 어찌 숙연해지지 않겠는가, 지금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이 되면 그 때처럼 생명을 바쳐 독립전쟁에 나설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골짜기 어느 곳에 백골이 되어 아직도 조국의 산하를 그리면서 잠들어 있는 독립군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청산리 대첩 기념탑

더 이상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 궁벽한 오지에 청산리 대첩의 흔적이 더는 없다고 한다. 기념탑에서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널찍한 계곡에 높은 교량이 놓여 있고 철도공사기 진행 중이다. 장춘과 훈춘을 오가는 고속철도라고 한다. 이 청산리 계곡 오지 옆으로 고속철도가 지나가리라고는 100년 전에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산리 대첩 후 일제는 참패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서 우리 민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1만여 명을 학살하고, 2천 5백여 채의 민가와 30개 학교를 불태웠다. 소위 ‘경신대참변’이다. 민족 참혹한 비극이었다. 사실 일제는 정식으로 맞붙은 전투에서 별로 승리한 적이 없다. 패전하면 어김없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이 일본 군대의 저주받은 습성이다.

▲ 청산리 계곡 남쪽을 지나는 장춘-훈춘 고속철도

청산리를 뒤로 하고 이도백하로 향했다. 150km 정도를 가야 한다. 이도백하는 백두산 오르는 초입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다. 길이 좋지 않아 네 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한다. 들길과 산길을 달리면서 표고가 조금씩 높아지지만 경사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점차 소나무가 사라지고 자작나무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잡목들로 울창한 산길이다. 중간에 큰 고개를 넘었다. 장백산 약초를 파는 휴게소에 들렸는데 산삼도 팔고 호랑이 뼈로 담근 호골주도 팔고 있다. 가짜는 아닐 텐데 호랑이 뼈를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하다. 백두산 산록의 늘씬한 미인송을 호텔이 가까워지자 몇 그루 볼 수 있었다. 밤 9시가 넘어 장백산금수학국제주점 호텔에 도착했다. 간단히 저녁밥을 해결했다. 온천에서 피로를 풀려고 했으나 입장료가 200위안이어서 포기했다. 이곳은 해발 1천m가 넘는 고지대여서 시원하다.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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