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없는데 무슨 중 노릇을 하겠나, 나라는 모든 것의 기본이다...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지금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서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혼자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고 모여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모여사는 공간은 국가가 대표적이다. 국가단위로 오늘날 세계일류의 삶이 돌아간다. 함께 살아가는 전형적인 운명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라는 공동체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71년전 까지만 하더라도 삶의 기초인 국가가 없었다. 망국민으로서 왜구의 침략전쟁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며 절망 속에서 살았다. 서기1937년 경에는 왜구의 발호가 더욱 거세져 독립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영원히 왜구에게 흡수되어 갔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까지도 저항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변절하여 차라리 왜구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옳다며 적극 왜구화를 부르짖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왜구는 모든 방면에서 왜구화에 속도를 냈다.

▲ 만공선사. 그는 경허선사의 맥을 이어 한국불교의 원형을 지키는데 노력하였다. 일제의 불교 내선일체획책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보내는 등 독립운동가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불교를 왜구불교로 통합시키고자 조선총독부가 나서서 적극 추진하였다. 왜구가 패전 한 후 도쿄재판에서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미나미지로(南次郞)가 조선총독이던 서기 1937.3.11.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전국에 있는 조선 불교 31본산 주지회의를 개최하였다.

▲ 맨왼쪽은 미나미지로가 패전 후 서기1946년 도쿄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죄수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가운데와 오른쪽은 재판을 받기위해서 다른 전범들과 함께 법정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미나미지로(南次郞)는 제7대 총독재임기간(서기1936-42) 중 가장 악랄하게 식민통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국어 사용금지,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강제, 지원병강화등 폭압으로 일삼았다. 황국신민화획책을 가장 혹독하게 한 자로 알려져 있다. 패전 후 도쿄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석방되어 1955년에 죽었다.

명목은 조선 불교 진흥책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말이 조선불교진흥이지 조선불교와 일본불교를 하나로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조선총독 미나미지로는 조일불교의 내선일체론을 들고 나왔다. 고압적인 자세였다.

“조선불교는 과거에 아무리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현재는 부패한 불교가 되었다. 전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씨의 공이 막대하다. 승려들이 도성을 출입하게 된 것도 다 전임 총독의 사찰령 선포에 따른 은전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마땅히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는 합하여 보다 큰 진흥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경무총감도 배석한 이 자리에 모인 조선의 본산 주지들은 총독의 이 같은 발언에 누구하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데라우치 총독이 조선승려들로 하여금 처를 들이고 고기와 술을 먹도록 해 놨기 때문에 반이 일본불교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 만공滿空이 벌떡 일어나서 주장자(지팡이)를 땅이 꺼지라 치고 나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으허!” 그리고 사자후를 뿜어냈다.

“청정淸淨이 본연本然이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

이는 “우리 조선 사람들도 너희 일본사람들도 다 선하게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놔두면 될 텐데 갑자기 왜 산과 강과 대지를 말하는가, 본디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왜 산하대지가 생겼다는 것이냐” 라는 것이다(수덕사 수연스님증언. 서기2016년 현재91세).

만공은 이어 조선총독부의 조선불교 왜구화 획책을 꾸짖으며 전임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저주 하였다.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조선의 모든 승려로 하여금 일본 불교를 따르게 하여 대처와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또한 부처님의 계율을 파하게 하여 불교에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지금 무간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음이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 조선 불교는 1천5백년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하거늘, 일본불교와 합하여 잘 될 필요가 없다. 정부에서 종교를 간섭하지 말라, 불교 진흥책은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만공의 이 같은 발언에 조선 총독 미나미지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부들부들 떨며 ‘마곡사 송만공 주지는 조금 전에 내 뱉은 망언을 당장 취소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만공은 ‘조선 불교를 진정으로 진흥코자 한다면 간섭하지 말고 그냥 조선 승려들에게 맡겨놓으라’고 응수 하였다. 이 때 배석했던 경무총감이 전임 총독 데라우치 마다사케의 아들이었다. 경무총감이 자신의 아버지를 모독한 것에 분개하여 처단을 하고자 하였으나, 미나미지로는 조선의 명망 있는 승려를 잘못 건드리면 조선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켜 문제가 더 커질것이라고 하며 말렸다. 그리고 미나미지로는 만공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대신 회유책을 써서 목적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만공에게 일본여행을 시켜 일본에 대한 저항심을 잠재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충남 도지사를 시켜 경비는 일본이 댈 것이라며 만공에게 일본여행을 제안한 것이다.

이에 만공이 다시 한 번 왜구의 음모를 날려 버렸다.

“나라 잃은 백성은 송장이나 다름없다 송장을 데려다가 일본 천지를 돌아다니도록 하는 이유가 뭔가, ‘자, 보아라. 저자들이 바로 조선 불교계의 송장들이다’ 라며 구경시키자는 것인데, 내 어찌 그런 망신을 당하러 일본에 간단 말인가!”

이후 만공은 선학원을 설립하여 조선불교 지키기에 온 힘을 기울였고, 만해 한용운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투쟁에 힘썼다.

만공은 조선의 생민으로 보이지 않는 독립전쟁을 벌였다. 그가 이 같이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불교도 결국 나라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만공의 이와 같은 행적은 왜구난동기 왜구의 개국시조 ‘천조대신’을 찬양하며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나선 개신교세력이 해방 후 단군이 미신이고 단군에게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하며 단군상 부수기에 앞장선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 수덕사에서는 지난 9월 8일 만공선사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만공선사의 독립운동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덕숭총림 수덕사는 ‘황하정루’에서 서기2016.9.8. 만공선사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가졌다. 벌써 8회째다. 올해에는 ‘일제하 만공선사 항일 사자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날 이은윤 전 중앙일보 대기자는 ‘만공의 선사상과 항일독립정신’으로, 김광식 동국대 교수는 ‘만공의 독립정신과 유교법회와 간월암 기도’로, 이덕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는 ‘만공의 참선지도에 나타난 자주정신’으로, 이동언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은 ‘만공 큰스님과 주기철목사의 생애와 독립정신’으로, 하춘생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주임교수는 ‘만공의 비구니 교육에 나타난 독립정신’으로 각각 주제발표를 하였다. 이 날 참석한 승려들과 발제자들 그리고 지역의 국회의원들은 하나 같이 만공이 독립운동가로 국가에서 지정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한국방송공사와 지역 언론들도 취재에 나서 이번 학술대회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수덕사는 매년 만공학술대회를 이 맘때쯤 갖는다고 하였다.

벽초碧超가 나아가 노스님(만공)을 한번 부르니 만공 스님이 대답하자,

벽초가 말하기를 “차마 노스님이기 때문에 여쭙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만공 스님이 이르되, “노스님이라고 말 못할 게 있느냐?”

벽초가 이르되, “노스님이 제 말을 모르셨나이다” 하니,

만공이 “혹 늙으면 더러 그럴 수도 있느니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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