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석학, 양계초가 말하는 대한제국 망국풍경,서기1910년 8월 22일 추밀원회의 열어 22일 ‘합방’ 발표 결의이 날은 순종즉위 4주년이니 축하연을 연 뒤에 발표하자이에 일인들이 허락하여 29일로 ‘합방’공포날짜 정해져 “합병조약은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의 논의 단계를 거쳤고, 17일 데라우치가 일본정부에 전보로 통지했다. 18일 일본정부는 임시 내각회의를 열었고, 22일에는 임시추밀원 회의를 열어 25일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그런데 조선정부가 갑자기 그날이 조선황제의 순종즉위 만 4주년 기념회를 열어 축하한 뒤 발표
글: 장계황(한국역사영토재단이사장, 행정학박사) 장계황의 독도이야기 5일본, 미국과 영국의 협조하에 독도에 대러 감시용 초소 세움일본내무대신 카쓰라 다로 독도일본편입 내각회의요청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은 독도 강제 편입사실을일제가 관보에 못 싣고 현보에 실은 것에서도 확인 일본이 독도를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것은 영토에 대한 역사적 사실 때문이 아니다. 러일전쟁을 수행하고자 강탈했다. 러일 전쟁을 위해 독도를 무단으로 수용한 것이다.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동해로 남하 하는 것을 감시하
해방공간 미국군정부 식민통치하리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와 친일지주 한국민주당만 남아한국독립당 등 광복군 민족주의 정치결사체 제거됨분단은 소련군에 항복한 일본 관동군이 제공한 측면 강함해방공간 동아일보 신탁통치 정 반대 보도는 의도된 것 “리승만정권수립은 맥아더, 하지, 리승만 동경 3인비밀회담서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날짜가 중요하다. 리승만 귀국일은 서기1945.10.16.이다. 상해임시정부 백범 김구는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들어왔다.”서기2018.12.08. 의백학교 수업강의에서 이덕일 의백학교 교장이 이 같이 일갈했다. 지난
임재해 교수 식민사학에 일갈, “저들은 학자 아냐”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과감하게 탈피하여바른역사 찾을 수 있어단군개국신화가 역사가 아니면 고구려, 신라, 부여도모두 역사가 아닌 신화일제식민사관의 실증주의 제멋대로 사관 비판생활사료개념 인정하면 단군은 물론 이전한웅천왕 신시배달국도 역사 찾을 수 있어 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임재해 교수가 강단식민사학계를 향하여 사자후를 토해냈다. 강단식민사학자들은 학자가 아니라고 꾸짖었다. 서기2018.11.17. 강원 춘천시 베니키아 베어스 호텔 의암홀에서 강원도 국학원이 주최한 학술발표회에서
중국공산당, '장백산 문화론'까지 조작하여 백두산도 중국화선도 제천문화, 백두산 포함, 춘천 중도유적 맥국으로 수렴가능한웅천왕 신시고국을 알면 춘천 중도유적, 만주 등 우리역사로 포섭가능 지난 서기2018.11.17. 강원도 춘천시 베니키아 베어스 호텔, 의암홀에서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 관련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국회 헌정기념관 등에서 춘천중도 고조선 유적지 보존 학술대회가 있었지만 추천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국학원(권은미 원장) 산하 강원국학원이 강원국하운동시민연합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주제를 ‘중도 맥
불의 역사 물줄기 돌리려던 동학혁명 본산보은 속리산초등학교 마당서 고천제 거행의백학교 학생들 동학혁명 본고장, 보은서1박 2일 의백정신 풀무질 활발하게 펼쳐‘개같은 왜적놈’ 거센 화력앞에 쓰러져 간동학혁명 원혼들 아직도 피맺힌 한 진동해 "진달래 되어 조선산하 굽이굽이 꽃불밝히리라"서기1894.12.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여 보은으로 몰려든 동학농민군은 추격해 온 이들과 다시 맞닥들였다. 수백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12월 18일 눈까지 지독하게 내려 더욱 추웠다. 짚신바람, 헤어진 옷가지, 농민군들은 불을 지펴 몸을 녹였으나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언어 보존이 민족 보존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함민족 말과 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애국 먼저 일제시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삶을 살펴보자. 이윤재는 마산의 창신학교와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고, 3차의 옥고를 치렀다.3·1운동 참여로 1년 6개월간 평양 감옥 생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년간 서대문형무소 생활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끝내 함흥형무소에서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다.그의 반일 의식은 3년간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면서 신
전형배 21세기민족주의포럼 기획위원chb5910@naver.com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북경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중국 북경대학교 저명학자, 고힐강북경도 조선 땅이었다는 박사논문 통과시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지린 박사중국 하북성 북부도 조선 강역임을 고증함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잊혀져가는 보기좋게 풀이하여 다시 내놓다 남쪽에서 57년 만에 발간된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리지린 지음/이덕일 역해, 도서출판 말 발행)는 내게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심백강 박사,역사는 역사가가 채택한 자료만 역사로 남아중국은 중국역사를 쓴 것이지 우리 역사 쓴 것 아냐중국사료를 기준으로 우리역사 찾으면 안돼중국 관찬사서는 당나라 때 부터 시작우리역사 조직적으로 은폐, 왜곡한 전형 “안시성 전투 영웅, 양만춘 중화족 눈치 보느라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징기스칸 다음으로 큰 영웅이었다.”“남북조시대 중원대륙은 작은 나라들로 난립했고, 서양은 동서로마로 쪼개져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세계최강이었다.”이 같은 발언을 서기2018.10.16. 대동재단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심백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북조선,"남조선 당국은 일제 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사망자는 1650달러라는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4. 한일협정과 북일 수교한국 외교통상부가 2005년 1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다. 한국의 친일 보수신문들도 거들었다. 한일협정에 관한 일본의 협상 기술이나 전략 또는 치부가 드러날까봐 우려했을 것이다.외교문서가 공개되자 1990년대 초부터 논의되던
일제식민통치 흔적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금광동 동국사, 일제침략 선봉대로 포교활동 나서신흥동 일본인 히로시 일본가옥, 일본지주의 조선인 수탈 상징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펄펄 끓던 여름이 갔다. 세월은 어김없이 입추立秋를 넘어 벌써 완연한 가을을 알리는 백로白露를 지나고 있다. 나이 들면 세월이 더 빨리 간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아마도 삶의 주름이 늘어남에 따라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리라. 그 만큼 있는 그대로 삶은 멀어진다.올해도 4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인생도 흘러간다. 인간 삶이라는 것이 죽기 전에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한국은 불안정한 의붓자식”김종필,“재일동포 지위와 문화재 반환 등도 얘기했지만이들은 사소한 문제다”“‘보상금’ 명목이 아니라도 좋다 돈 만 달라”일본은 ‘독립축하금’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돈 줌중국 명나라와 이조선과 사대주의 주종관계,미국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되풀이 되는 현대사 3. 한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3) 박정희 정부 시기 (1961~1965년)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그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
식민사학은 정보통신망 발달로 수명 다해이육사의 시, 빈들에 씨 뿌려이제 역사광복의 씨를 뿌리고 꽃피고 열매맺을 때요서 우하량서 여신전과 곰, 새 옥기 출토한웅천왕 신시, 신단수 배달국 증명똘똘 뭉친 깨어있는 시민들이 역사광복 주체 고려 시대 일연이 쓴 첫머리에 ‘고조선’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군신화’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고조선’의 내용은 단순히 단군의 조선 얘기만 나오지 않는다.단군 앞서 또 다른 역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태백산 신단수와 신시를 중심으로 하는 한웅천왕이다. 또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 학과 교수) 서기1953년에도 일본은 이랬다"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한일수교 거부이는 이승만의 뿌리깊은 반일감정 때문그러나 말년에 가서는 미국요구에 굴복그 후 허정과도내각, 장면정권은 미국요구를 수용,한일수교에 적극 나서 3. 한일 수교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한국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공 정책에 따라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은 미국이 1947년부터
박정희 새마을 운동 이전에이미 동학농민봉기시절부터 민간주도 농촌계몽운동존재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박정희 이전 장면정권에서 수립추진 박정희 516군사반란, 장면정권서 확정된 미국자본지원 무산시킴오늘날 경제번영은 국민 희생과 뛰어난 기업가들 때문박정희는 오히려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박정희 우상, 박물관, 기념관 등을 수천억원 들여 세웠다. 또 박정희 덕분에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는 교육도 강조되었다. 그래서 박근혜는 탄핵되기 전 까지 국사교과서를 국정화로 바꾸어 박정희 공을 높였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정희-박근혜 부전여전인가박정희 한일굴욕협정 뒤에 미국제국주의 자들이 압박박근혜 한미일 삼각동맹에 따른 매국 한일군사정보협정에도배후에 미제가 존재 "당시 남조선 당국은 일제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1. 연재를 시작하며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적대 관계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눈에 띄게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의혹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당시 주한미국대사,‘인구비율로 따지면 미국보다 한국이 2~3배 많은 병력 투입’ 주장하며한국군 파병 반대베트남 투입된 한국군, 미국에게 돈 받고 파병된 미국 용병 부인 못해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든 사실상 제2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의 민낯1960년대 베트남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반대와 저항을 받았던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이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저지른 범죄행위였다.첫째, 이러한 침략전쟁에 남한은 처음엔 미국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적극적으로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번엔 남의 나라까지 가서 서로 죽인 남북한북조선의 서기1960년대 후반 폭발적인 남한 도발은박정희가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것이 원인북조선, 프에블로호 나포이후에도 미군 정찰기 격추,미군 직승기 격추, 미군 살해이에 미국이 북조선을 공격하지 않고거꾸로 북조선에 거듭 사과베트남전쟁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 5. 북한의 필사적 대응과 파병1965년 3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시작된 제2차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싸운 나라는 남한이었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회 연구교수) 김두봉,국어학자, 대종교인, 공산주의자로 국어독립투쟁,무장독립전쟁에 뛰어들다해방 후에는 북조선 건국 중심인물로 떠오르다김일성 1인 숭배 우상화에 반대하다 숙청되다 김두봉은 우리 말을 어떻게 보았나주시경의 한글운동에 대한 반제국주의 인식은 김두봉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두봉의 민족운동의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김두봉은 1909년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안희제·남형우·신백우·이경희 등 동지와 함께 조직하였다.그는 주시경의 수석제자였다. 1911년 주시경이 운영한 조선언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정희,처음 미국요구도 없는데 ‘전투병 보내겠다’제안비전투병도 미국 요구보다 ‘두 배 더 보내겠다’ 앞서감성급한 불평등 한일수교도 미국의 입김이 작용해비율로 따지면 전쟁 일으킨 미국보다 2~3배 많은 병력 투입5만명이 넘는 한국군 파병되다 4. 미국의 무리한 파병 요구와 남한의 지속적 파병1964년 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고, 1964년 10월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공식적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했다.1964년 12월 브라운 (Winthrop 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