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세훈(‘씨ᄋᆞᆯ의 소리’ 편집위원) 1882년 임오군란, 민비 척족의 국정농단에서 발단민영휘를 선혜청에 앉혀놓고 나라 곳간 털게 해무당을 끌어들여 진령군에 봉하고 그의 통치 받아민비 임오군란 때 죽었더라면 동학혁명 없었을 것임오군란(1882년. 고종 19년)이 터졌다. 신식군대 별기군에 대한 구식군대의 불만이 원인인 것 같지만, 실은 나쁜 권력자에 대한 분노였다.병졸들이 궁궐(창덕궁)로 쳐들어간 것은 민비를 잡아 죽이려는 것이었다. 중전은 측근 장정에게 업혀 현장을 빠져나가서 멀리 충주까지 도망갔다.군인들은 1년 넘게 월급을
글: 김정락(미학자, 서울대 미학과) ‘서당’ 풍속화를 김홍도는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실내는 없지만 인물들을 통해 실내를 연상하게 해훈장은 가장 멀리있음에도 가장 크게 그려 비논리가장 앞에 있는 왜소한 학동을 가장 작게 그려왜소한 이 학동이 시선을 끌고 공간을 왜곡해 놔 아래의 그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조 때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렸다는 풍속화첩의 하나인 이다.A4에 해당하는 이 작은 그림은 당시 일반 백성의 삶을 묘사한 것이고, 풍속화로 분류하고 있다. 장르의 분류나 그림의 용
글:김정락(미학자, 서울대 서양화) 퇴계 학풍 계승한 근본주의 성리학자, 김상헌왕이 아닌 조선에 충성한 것, 삶 곳곳에 보여청 태종에게 보낼 왕 친서 찢어버리는 결기도삼전도 치욕에 목매달아 자결 시도했으나 실패청의 회유, 협박에도 의지 꿋꿋, 청 관료도 탄복‘맑은 그늘’이란 뜻의 호를 썼던 김상헌은 선조 때 태어나 효종 때 사망한 조선의 (고위)관료였다. 퇴계의 학풍을 계승한 그는 근본주의 성리학자였다.오늘날 그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핵심인물이고, 철저한 사대주의자였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의 시조
세계 유수의 기관과 학회, 훈민정음은 가장 우수한 문자구강 구조와 혀 놀림을 분석하여 만든 글자로 과학성 우수유네스코, 훈민정음은 문맹 퇴치 사업에 가장 적합한 글자북한은 지난달 21일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연구사 박사 부교수 리금일 입을 통하여 훈민정음의 가치를 밝혔다.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문자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글은 국제기구와 세계적인 잡지 및 세계언어학회에서 평가한 것을 소개하고 북한에서 평가한 훈민정음의 의미를 설명하였다.그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면에서 세계 1위고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안과 의사) 노량해전, 퇴각하는 왜군 1만 이상 척살소서행장, 사위 덕에 무사히 일본으로 도주풍신수길 문장, 자민당 극우 세력과 동일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고■ 현재 일본 정권은 대한민국의 우방국가가 될 수 없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봤다. 배우 백윤식이 맡은 역할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인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의 왜장(倭將)이라고 하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많이 알려져 있다.그러나 실제 동원된 군대수를 보면 조슈(현재
헌종 12년 전남 나주목서 작성한 호구대장 발견32년전 지인에게 받은 고서 거풀에 적혀있어정홍팔을 중심으로 친족, 외족, 처족 정보 담아반역자 색출 처단, 세금, 군역, 부역 징발 목적은촌재라는 필명을 쓰는 얼굴책 사용자는 2024. 01. 9. 자신의 얼굴책 게시판에 리조선 헌종 12년 전남 나주목에서 만든 호구대장戶口臺帳 하나를 소개하였다.32년전 쯤에 당시 자신보다 15살 정도 많은 지인에게 다른 고서와 함께 선물로 받았는데 최근 이 고서들을 정리하면서 그 중 1권이 거풀이 헤져서 다시 제본하려고 거풀을 뜯다가 호구대장을 발견
글: 류돈하(역사 평론가)노량해전 벌어진 곳은 현재 경남 남해순천서 도주하는 소서행장 추격으로 시작왜군 2만여명 수장, 왜선 2백여척 파괴이순신, 왜군 유탄 맞고 전사, 진린 통곡 (이순신의 마지막: 부제=누가 감히 비교하는가!)" 전투가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하라.(戰方急 愼勿言我死)"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4.28~1598.11.19) 장군의 이 유언은 불멸로 남아 오늘날에도 널리 전해지고 있다.이 유언의 출처는 징비록으로 이 유언을 남긴 곳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 벌어진 노량(현재의 경남
글: 김정락(미학자, 서울대 서양화 전공) 조선의 한양은 성리학적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삼봉 정도전, 서울에 행정계획, 5백년 조선 새겨전조후시, 좌우묘사 기본적인 배치로 도시 완성조선, 명 제후국이라 제후칠궤로 7대 수레 로폭김포 서울시 편입시도, 표 구걸, 서울 괴물만들기 흔히 도시계획이나 도시공학 따위를 말하면, 건축학과 (도시)사회학의 통섭쯤으로 생각하기 쉽다.도시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문명이라는 학자도 있고, 도시란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관계라고 여기는 것도 일반적이다.도시는 자생적으로 발전된 공동체적 환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태종 이방원, 세종 배후에서 상황으로 왕 노릇 계속왕권 안정을 위해 사돈 심온 등 외척 도륙, 노비로세종의 비, 소헌왕후 지옥 같은 궁궐 생활 잘 극복한양의 대 화제 때 세종이 없는 사이 진화 진두지휘세종과 더불어 조선 시대 이상적인 국모로 내내 칭송 ㅡ 소헌왕후: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왕비가 된 세종의 비 ㅡ그저께는 세종대왕 탄생일(1397년 5월 15일)이었다.세종대왕의 왕비는 소헌왕후(1395~1446)로 세종보다 2살이 많다.세종이 왕위에 올랐는데도 상왕인 시아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신종근 제천답사기 2사도세자 죽음 당연시하는 벽파, 동정하는 시파시파에 천주교 신자 많았으나 정조 관대 정책 펴정조 죽고 벽파 집권, 천주교 사교화 탄압 시작천주교 신자 황사영 북경주재 서양 신부에 백서‘조선 청에 복속, 서양 함포로 조선 굴복 시켜야’1801년~ 1866년까지 자국민 1만 3천여 명 학살 ■ 배론성지, 황사영 백서사건배론은 1801년 황사영 백서(帛書)사건과 우리나라 최초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또한 길 위의 사제,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1821~1861) 신부 묘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1. 뛰어난 학자요 정치가였으며 책벌레신숙주(1417 ~ 1475)는 조선 세종 ~ 성종 때의 학자이며 정치가다.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관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이다.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지독한 독서광이었다.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신의 옷(곤룡포)을 덮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이 이야기의 주인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전쟁 징조 무수하였으나 안일한 대비로 왜란 자초왜군 침공 소규모로 파악 경남지역 국한 전쟁대비방군수포제의 문란과 제승방략제 비현실성 드러나2백 년 가까운 평화로 백성들 전쟁대비 노역 불만 우리는 임진왜란이 사전에 무수한 침략의 징조가 있었지만, 조선조정이 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해 자초한 비극이라고 알고 있다.그러나 조선 조정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꿰뚫고 있었다.그래서 꽤 많은 대
글: 전집현(역사연구가) ‘개혁 군주’ 정조 인상은 이인화 소설 ‘영원한 제국’이 한몫정조 집권 기간은 유럽문물 동양 쇄도 세계적 변화 격동기신유박해 등 천주교 압살, 서양 서적 불태우고 성리학 고집서양 서적 금수 조치, 교류 금지 선언, 청과도 학문 교류 단절농사만 중요시하고 상공업은 인간 탐욕 부추긴다며 억압일관자기 안위를 위하여 장용영 설치로 재정 낭비, 세도 정치 불러 정조(재위 1776~1800)는 개혁 군주이며 통치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였다는데(?),조선은 다음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기생 광한선을 취하는 것이 두렵다던 연산군자색 좋은 비구니 7~8인 간음했다는 것과 모순연산군서 나온 흥청망청의 흥청은 전문 음악인흥청은 연산군이 아니라 사대부들의 색탐 대상 연산군, 절대왕권을 꿈꾸었던 고독한 군주 (제1부)연산군을 위한 변명황음무도한 군주였나?사관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모는 단골 소재는 황음(荒淫)이다. 연산군이 여색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것이다.실제로 그런지 살펴보자. 연산군 9년(1503) 6월 13일 음악 담당 기관인 장악원(掌樂院)에서 가야금 타는 기생 광한선(廣寒仙) 등 네
글: 신종근(의사, 역사연구가) 조선 사대부 비문 어김없이 有明朝鮮으로 시작병자호란 청과 싸우자던 김상헌 비문도 유명조선조선 선비들이 명나라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자랑스럽게 여긴 것을 자신의 비석에 새겨놓은 것유명조선이 현재는 유일한국, 유미한국으로 바뀌어일본과 미국을 자신 모국으로 생각하는 사람 많아 유명조선(有明朝鮮)남양주시에는 김상헌 묘가 있다.김상헌[金尙憲, 1570년(헌종 2년)~1652년(효종 3년)]은 잘 아는 것처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학창시절 배웠던 시조가 유명하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1866 미국 상선이 공격하자 관찰사와 평양 관민이 격퇴1871 미국의 강화도 공격으로 패배했으나 끝까지 싸워이때 빼앗아간 군기는 회수돼 강화도 박물관에 다시 보관뒤이은 프랑스군의 공격도 막아내어 자신감 얻은 정부전국에 서양인을 서양인을 물리치겠다는 척화비를 세움 1. 1866년 침략자 미국 상선 격침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민간인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그러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 휘하의 관민이
어버이로 섬기던 명나라에 뇌물 주고 얻은 왕, 인조임금청나라를 오랑캐라 무시, 청 황제 즉위식에 인사도 안 해청 침공하자 36개 도주, 인조 총 4번에 걸쳐 도성 버려전쟁 패배 표시 삼전도비의 수난, 세우고 매장하길 되풀이국가가 저질러 놓고 피해자인 백성을 오랑캐 자식이라 비난 < 조선 인조 : 사대 명분에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식마저 죽여>1. 명분 핑계로 등장한 인조잠시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은 광해에게 반기를 들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무리한 궁궐공사, 동생 영창 살해, 인목대비 폐위, 명에 대한 배신 등이 명분이었다.인조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평택 역사 탐방 2수취체제 폐단이 부른 조선 백성의 참담한 생활상대동법으로 세금 부담 더하게 된 지주세력의 저항16세기 나왔으나 전면 실시는 2백년 뒤에 겨우 가능대동법 실시로 대기근에서 백성 굶어 죽는 것 막아새로운 직업과 자본의 축적이 가능한 상인의 번성 김육과 대동법대동법(大同法)은 동양 유교사회의 기본 세법인 조용조(租庸調) 중 농지세인 전세(田稅) 조(租), 즉 공납(貢納)을 쌀로 대신해서 납부하게 하자는 방안이었다.조(租), 즉 전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1결당 최하세율인 4두를
글: 류돈하(역사연구가) 명나라 이탁오, 조선의 허균 모두 새 시대를 여는 개혁가모두 관리였고 유학에서 시작했으나 유학을 뛰어 넘은 이단아 이탁오는 신분제 폐지와 여성인권도 남성과 동등하다고 주장허균은 정치적 금고와 사회적 차별의 서자와 어울리고 구제시도 (허균과 이탁오)명나라 임탁오(1527~1602)와 조선의 허균(1569~1618)은 새 시대를 꿈꾼 개혁가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특히 신분제가 공고한 사회에서 신분의 타파와 민중들의 권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또한 양 선생은 유학반도이자 유교사상을 초월하
글: 류돈하(역사저술가) 양천 허씨 4남매 이야기난설헌, 교산 남매의 우애는 각별했다.당대 최고의 명문가에 태어나 천부적인 재능으로 문장과 시에 빼어나기도 하였거니와 시대를 초월한 사상은 오늘 날에도 능히 통용되는 바이다. 남매의 부친 초당 허엽은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낸 문관이다.일찍이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서 학문이 높았으며, 훗날 김효원과 함께 동인을 이끌었던 영수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초당의 또 다른 스승 퇴계 이황은 초당을 선인(善人)이라 일컬었다.허엽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첫째 부인 청주한씨에게서는 허